진부한 일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밤의 가시성

의식의 정전 상태에서 임박하는 에덴,

유령적인 이미지, 투명한 사태

나타날  없는 것의 나타남.

 

저에게 예술은 언제나 일상의 진부함 가운데 시적 순간, 비언어적인 틈, 그리고 비일상을 기입하려는 시도였습니다. 10여 년간 블러(blur), 혹은 아웃오브포커스(out-of-focus)의 사진 이미지를 재현하는 유화 작업을 해온 저는 이장욱 시인과의 2인전 <희박한 이름 Fleeting Names (2013)>을 계기로 ‘탈회화’적인 조형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전 유화 작업의 ‘블러’가 재현보다는 ‘재현의 불가능성’을 지칭하는 회화적 표상이었으며 ‘탈회화’를 실천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였다는 것을 깨달은 저는 2015년 <구름이 덮였을 때: 기원과 심연에 관한 에세이 Shrouded in Clouds: An Essay on Origin and Abyss>을 통해 컴퓨터 그래픽과 설치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회화 이후의 회화(post-painting)”라고 명명한 저의 작업은 스트라이프(stripe) 패턴을 중첩시키는 행위의 반복(layering)을 통해 회화라는 매체와 재현을 해체하는 시도입니다. 2013년까지 이어진 ‘흐린 풍경(blur-painting)’ 작업이 가시성에 비가시성을 기입하는 ‘비틀거리는 재현’을 수행했다면, 최근 작업은 회화로부터의 거리두기와 ‘재현으로부터의 이탈’을 감행합니다. 이는 재현할 수 없는 것, 또는 재현할 수 없음 그 자체,  즉 ‘심연(abyss)’을 지칭하는 회화의 본모습을 조명하는 작업입니다.

최근 막을 내린 <밖에 있는 것 Off-Scene>은 <기적, 텔레파시, 잔여물 Miracle, Telepathy, Leftovers(2016)>과 <청천벽력 Out of the Blue (2016)>에 이어 ‘탈회화 운동’을 보다 큰 규모로 시각화한 전시입니다. <밖에 있는 것>은 익숙한 것들이 속한 세계, 즉 프레임의 바깥에 존재하는 낯선 이미지의 세계를 가리키는 제목입니다. 주변성과 장식성을 특징으로 하던 스트라이프 패턴이 중심 코드가 되면서 어떤  ‘결핍의 경험’과 ‘무의 상황’을 연출하고, 여기에 이중성과 역설을 담은 텍스트를 제목으로 붙여 또다른 상상의 균열을 일으키고자 하였습니다.

<기하학적인 어리석음 Geometric Stupidity>, <모든 것이 가시적인 예배 Supravisible Worship>, <이름을 얻은 구원 Names of Salvation>은 아크릴, 유리, 나무, 금속 등을 사용하여 만든 입체 조형물로, 평면에 머무르던 레이어들을 호출하고 공간화하는 시도입니다. 이는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에 소장된 <서로 입 맞추는 코라 Kissing Khôra (2016)>의 연장선에 있는 설치 작업이기도 합니다. <나타나는 회화Appearing Painting (2015)>, <밝은 방 실험 Studies on Origin (2015)>, <심연의 실험 Studies on Abyss(2015)> 등은 실험적인 초기 디지털 드로잉 작업으로, <도착하는 대답 Arriving Answers (2016)>, <소용없는 회상 Useless Flashback (2016)>, <납작한 은혜 Flat Grace (2017)>등의 모습으로 진화해왔습니다. 이들은 모두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심연적인 것들’과 잃어버린 회화의 ‘휘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회화 이후의 회화”는 결국 ‘낯선 모습으로 돌아온 회화의 잔여물, 회화에서 분열된 (재현의) 거짓말, 혹은 (사라진) 회화를 향한 영원한 그리움’입니다.

윤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