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주 대상으로 등장하는 사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풍경 사진에서 익숙한 미래지향적 성향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특히 이런 유형의 사진들은 전형적으로 가옥, 도로 그리고 온갖 종류의 인공 구조물들을 보여주며 우리를 예측 불가능한 미래의 사건에 대한 관심에 접근하도록 유도한다. 주거 공간은 악천후와 위험 요소로부터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제공하기 때문에 지어야 할 타당성이 있으며, 도로도 우리를 원하는 목적지로 향할 수 있도록 한다. 종교적 건축물에서 보이는 첨탑과 성채는 오직 상상으로만 다다를 수 있는 머나먼 미래를 지시하고 있다. 이러한 이론들은 위대한 19세기 풍경화에서 묘사하고 있는 운하, 철로 그리고 대농장의 풍요로움 속에 쉽게 적용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한 도식을 세상 모든 곳에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테면 한 그루의 나무는 그 나름의 고유한 계절성과 시간 감각에 따라 살아가며, 저 넓은 바다는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쉼 없이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다.

 

박형근의 사진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미학적 고려가 요구될지 모른다. 예를 들어 소나무 가지들과 나무 주변에 퍼져있는 붉은 액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장면은 단순히 초여름에 흔히 보일 수 있는 보편적 상황이 아니며, 그 빨간색의 실체는 지구상의 어떤 것을 직접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사진에 찍혀진 장소는 여우 굴이 분명해 보이지만 이와 같은 무미건조한 설명은 우리의 궁금증과 욕구에 크게 부응하지 못한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원래의 장면을 조작, 강화하여 지표면의 모습을 마치 흐르는 용암 속에 존재하는 상태처럼 보이도록 변모시켰다. 이 장면에 대한 더욱 적절한 해석은 우리를 지구의 중심부까지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장치라는 설명이 보다 더 설득력을 갖는다. 아마도 이 사진에서 보이는 붉은색의 꽃들이 그러한 가능성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꽃들이 강렬하게 불타오르는 토양 내부 세계로부터 발산하고 있는 뜨거운 열기를 암시하고 있다고 하자. 그러할 경우 우리는 여전히 인과관계에 의한 접근법을 다루고 있는 것이되, 그 누구라도 실제로 이와 같은 연관성을 창조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이는 오직 전지전능한 신만의 그 창시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들은 일상의 삶 안에서 당면한 현실 문제들에 근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오직 신과 같은 초월적 능력을 의해 이와 같은 불가능한 실현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형근의 작업 과정은 관객들을 그의 작품 내부로 초대하기 위한 형식적 요소들이 제시되어 있으나 그 이상의 구체적인 설명은 잘 드러내지 않는다. 여기 초록색의 수초로 뒤덮인 연못 한가운데에 찌그러진 플라스틱 공 하나가 놓여있는 장면을 포착한 사진이 있다. 이 사진 이미지를 일반적인 사건의 과정하에서 추론해 볼 때 우리는 그 볼의 위치가 누군가에 의해서 재조정 되었을지도 모를 가능성에 대해 상상할 수도 있다. 반면에 우리가 실제로 사진에서 보이는 장면처럼 볼의 위치를 원하는 어떤 장소로 움직이려고 시도할  경우, 우리의 육신은 아름다운 녹색의 수초들로 엄밀하게 위장된 늪의 심연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즉, 극복 불가능한 인간의 육체적 한계가 암시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필연적인 숙명성, 그리고 그 사후 세계의 영원성을 반영하기 위한 사진적 형식임을 관객들은 쉽게 이해하게 된다. 작가가 의도한 사건성들이 무한대의 문을 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작가는 보편적인 가치 판단 기준으로는 비교 불가능한 감각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 장의 사진에서 우리의 시선에 와 닿는 활짝 피어난 튤립과 수선화의 모습은, 이 사진이 봄철의 묘지를 찍은 것임을 짐작게 한다. 봄꽃들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피어있어서 계절의 변화를 암시하기도 한다. 또한 이를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고려할 때 그리스도의 죽음과 재림 그리고 부활에 대한 상징성을 내포하기도 한다. 이 사진의 의미를 유추해 보면 우선 수평의 십자가가 보이고 기울어진 묘비석이 배경과 완벽하게 수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오른쪽 배경에 똑바로 솟아있는 탑 하나가 그와 같은 의미화 과정을 완성시킨다. 영국 태생의 가장 시적인 사진가로 불리는 빌 브란트(Bill Brandt)가 1940년대 스카이섬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찍은 사진들은 박형근의 사진과 매우 유사한 접근법을 보인다. 여기에서 기울어진 묘비석은 불완전한 인간의 조건을 지시하는 동시에 보다 윤택한 삶에 대한 기원과 염원을 상징하고 있다. 박형근이 이 사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측면은 일상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보편적 상황들에 대하여 우리들은 늘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데 비해, 작가는 평범하고 반복적인 현실의 층위로부터 보다 본질적이며 고유한 의미들을 자각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무덤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화초들은 물론 기념비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처럼 그 꽃들은 짧은 순간의 생을 마감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운명에 있으며, 묘비에 쓰인 문구들도 시간의 흐름에 의하여 점차 퇴색되어 읽을 수조차 없게 될 것이다. 묘비문에는 과거의 생을 정리, 기념하여 미래의 시점에 기억되기를 바라는 기원과 축복의 메시지가 쓰여 있다. 그러나 삶의 세세한 과정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하기란 극히 힘든 일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기억들이 미래까지 존속되리라는 확신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작가는 우리가 소망하는 이상적인 결론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들이 서로 얽히며 공존하는 길을 예시로 들어 제시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기대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말이다. 그는 이러한 순간에 강한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동시에 혼란을 가하고 있다. 여기에 작가가 ‘추상적인 옷 Abstract clothes’이라고 제목 붙인 한 장의 흥미로운 사진이 놓여있다. 이 사진 속 상황은 설치 또는 구성된 장면으로 보인다. 그 사진에서 남성과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옷가지들 그리고 한 권의 책과 알약 케이스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에덴의 동산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실 추론적이지만, 저 책은 보편적인 인식의 범위 안에서 지식과 연관된 무엇인가를 재현하고 있으며 알약은 산아제한을 암시한다. 이 사진에 등장하는 버려진 옷은 선과 악에 대한 지적 소산들 중 하나였다. 결국 이곳을 에덴의 동산이라고 가정한다면 운명적 사건의 순서가 뒤바뀌어 발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거나, 혹은 아담과 이브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무대 뒤편 어딘가에서 사악한 악마의 방해를 받기 전의 시원적 순간을 만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대 사진의 다양한 양상들을 고려해 볼 때 그 특징을 표면화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그와 관련된 한가지 예로, 마치 눈 위에 놓인 새하얀 풍선과 같은 가벼운 스타일의 사진들은 이른바 일본 현대사진을 연상시킨다. 그런가 하면 북미 사진가들이 정책적으로 편애하는 사진풍이 있다 – 이런 사진들은 차라리 19세기의 살롱 사진에 가깝다. 이와 대조적으로 박형근은 하나의 심층 모델로 묘사할 수 있는 1920대와 1930년대의 초현실주의 경향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이번 전시에서 보이는 작품 중에 작가가 ‘두 그루의 나무 Two trees’라고 제목 지은 사진이 있다. 이 사진에는 빽빽한 편백나무에 의해 거의 가려지다시피 한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이 포착되어 있다. 당신의 기억을 되돌려보면 아마도 빌 브란트가 미스테리한 누군가와 장소에 대한 상징으로써 창문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음을 상기하게 된다. 박형근의 시학은 빌 브란트의 사진 세계와 유사하다. 특히 두 작가 모두 우주적 자각을 내포하고 있는 점에서 그렇다. 빌 브란트의 초기 사진 중에서 이른 아침 런던의 한 가정집 현관문 입구에 놓여 있는 우유병과 세계의 반대편에 위치한 뉴질랜드행 편도 항공편이 실린 신문이 보이는 사진이 있다. 이와 유사하게 박형근은 가을 녘 그림자에 반쯤 가려진 채 하얀색 베리들이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에 걸쳐져 쉬고 있는 지구의 모습에 주목한다. 이것이 바로 작가만의 방법론 즉, 지구의 움직임을 묘사하고 빛의 밝음과 어둠을 구분하기 위한 그만의 표현법인 것이다. 이는 즉각적이고 현상적으로 대상을 지각하지 않고 사물에 대한 통찰력과 감화력으로 다가가는 박형근만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분명히 현대사진의 중요 작가이다.                                                  – 이안 제프리, 2006, 6월(미술사, 미술비평)

박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