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나’에서 출발한다.

나에게 ‘나’는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나의 삶과 행동과 작업과 같은 다양한 부분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언젠가부터 나는 나에게서 비롯하는 말과 행동, 현상이나 변화들을 상징적 의미로 해석하고 이해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심에 작업이 있다.

작업의 시작은 개인적이고 내적인 갈등으로부터 일어나는 ‘알 수 없는 간절함’과 방향과 기동성을 잃어 ‘해결되지 않는 답답함’이었다. 그러다가 무심코 내가 그리거나 만들어낸 드로잉에 나의 상태가 반영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작업을 통해 적극적으로 반영으로써 나를 살펴보기로 하였다. 필요한 것은 나의 무의식이 작업에 반영될 수 있도록 최대한 의도를 가지지 않으려는 의식이었다. 즉, 작업은 나아가야 할 주제나 의도가 없는 최대한으로 순수한 나의 신체와 감각 반응의 결과물이 되어야 했다.

특히, 2013년부터 2016년 초 사이의 작품들은 ‘되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만들어진,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며’, 잡히는 대로 잡고 버둥거리며 ‘토해낸’ 것들이다. 당시 나에게는 작업 이외에 할 수 있는 다른 뾰족한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만, 무엇을 ‘해야겠다’ 라거나 무엇을 ‘하고 싶다’라는 선명함 또한 없었으며, 가지고 있는 것은 어디로든 조금 나아가고 싶은 ‘간절함’ 뿐이었다. 일련의 작업을 통해 일어난 나의 내적 변화는 작업의 변화를 일으키고, 작업은 그러한 나를 다시 반영하며, 나는 또다시 작품이라는 매개체로 상징화되었다. 이렇게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과정에 따라 작업들은 ‘나’를 관통하며 조금씩의 변이를 일으키며 다수로 생성되었다. 어쩌면 작은 모듈로써 다른 의미의 무엇으로 묶어질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지닌 채로.

이후, 작업은 사진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또 다른 변이를 일으키는데, 이는 우선 콜라주된 이미지에 따라 구멍이 뚫려 있는 작품 자체가 가진 특성으로 인하여 작업이 일반적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기에 부적절하다는 작업적 측면의 이유를 보완해 준다. 작품의 내적 측면에서 사진은 변화를 계속하는 빛과 공기와 시간의 풍경을 새로운 맥락의 확장되고 가변적인 프레임으로 제시하여, 작품이 풍경의 일부로서 풍경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독립적인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한다. 점차 사소한 ‘나’에게서 시작된 나의 은밀한 일기장과 같았던 작품들은 새로운 프레임 안에서 생성과 배치, 상호적용과 변이를 일으키며 본래의 ‘나’에게서 점차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김태령